이 간단한 해설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일 수도 있다. 사실 심리학에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분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론토 대학의 응용심리학자이자, 『심리학의 오해』라는 걸출한 개론서를 쓴 키이스 E. 스타노비치는 이러한 다양성이 “하나의 학문영역으로서 심리학의 응집성을 현저하게 감소시키고 있다.”고 말한다.[1] 또한 헨리 글라이트만은 심리학의 범위를 가리켜 “한 쪽 끝은 생물과학의 영역에서부터 다른 한 쪽 끝은 사회과학의 영역과 경계를 이루는 엉성하게 결합된 지적 왕국”이라고 말한다.[2] 실제로 미국심리학회(APA,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에 등록된 분과만 해도 54개 영역이다.
따라서 나는 대체로 텍스트북 선에서의 정의를 바탕으로 하여 심리학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플로리다 대학의 인지심리학자인 리차드 그릭스(Richard A. Griggs)는 심리학을 “행동과 정신과정,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상호과정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정의한다.[3] 핵심은 과학이다. 심리학은 다음의 네 가지 관점에서 행동과 정신과정을 살펴본다.[4]
연구관점
강조점
생물적
인간의 생리 (특히 뇌와 신경계)가 인간 행동 및 정신과정을 유발하는 방식과 유전과 진화가 인간의 생리에 미치는 영향
인지적
지각, 기억, 문제해결과 같은 인간의 정신과정이 작동하는 방식과 이들 과정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
행동적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일/사건이 관찰 가능한 행동을 조건화하는 방식
사회문화적
다른 사람과 문화적 맥락이 인간 행동 및 정신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사실 이 지점에서 심리학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심리학은 종종, 아니 자주 기독교와 갈등을 빚어 왔다. 성경은 인간의 심리를 다루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반대는 기독교 쪽에서 먼저 시작한 면이 있다. 100년 전만 해도 캠브리지 대학교는 정신물리학 실험실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이 주제의 연구가 "인간의 정신을 저울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종교를 모독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5]
물론 심리학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프로이트는 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술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개념은 다른 모든 문명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것과 똑같은 욕구로부터 생겨났다. 즉, 자연의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필요에서 나온 것이다.”[6]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특히 종교적인 회심을 심리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가 있어왔고, 그것은 기독교 교회와 지속적 갈등을 빚어왔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이후 기독교인들과 심리학자들에게 의해 효과적으로 논박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와 심리학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개관과 정리를 해보고, 기독교인들이 어떤 자세를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 심리학을 좀 더 명료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심리학과 심리학이 아닌 것
이 영역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설명을 제공한 사람은 위에 이미 언급한 키이스 스타노비치일 것이다. 그는 『심리학의 오해』의 초반부에서 우선 프로이트에 대한 아주 긴 비평을 이야기하면서, 프로이트가 제기한 많은 주장에 대해 대다수의 심리학자들은 기각하였다고 말해주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이라고 생각하는 대중적으로 떠도는 이야기들이 사실상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심리학이 아님을 말해준다.
놀랍게도 이렇게 알려져 있지 않은 지식이 바로 심리학이라는 분야다. 내가 심리학이라는 분야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겉으로는 대중매체의 상당한 주의를 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리학이라는 영역과 대부분의 일반 대중 사이에는 장막이 쳐져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되고 있는 "심리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대체로 착각이다. 많은 서점의 "심리학" 서가에 꽂혀 있는 대부분의 책들이 심리학계에서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중매체가 "심리학자" 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심리학회에서는 "심리학자" 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겉으로 보기에 심리학 "전문가" 인 듯한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이라는 영역이 지식을 축적해 나가는 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7]
과학은 대부분의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들을 영구운동 기계, 기적의 암 치료제, 과거로의 영혼 여행 등과 같이 잊혀진 주장들로 가득 찬 유형지로 추방시켜 버린다. 실제를 환상과 구분하고 사실을 넌센스와 분리시키기 위해서는 과학적 태도, 즉 회의적이지만 냉소적이지 않으며, 개방적이지만 잘 속아 넘어가지 않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과학자로서 심리학자들은 호기심으로 가득 찬 회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행동의 세계에 접근한다. 이들은 다음의 두 물음을 끊임없이 던진다. 무슨 뜻이죠?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기업의 좌우명이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어라' 라면, 과학의 좌우명은 '증거를 보여 주어라' 이다.[8]
잘못된 심리학적 지식으로 인해 선무당이 사람 잡는 예는 얼마든지 있고, 이는 아주 심각한 상황까지 간 적도 있다. 아래 사례를 보라.
1992년, 베스라는 이름의 한 여성은 직업과 관련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치료사는 그녀의 증상을, 어렸을 때 성 학대를 당한 희생자들이 보이는 증상과 유사하고 지금 자신을 너무나 학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치료사는 그녀에게 자가최면술을 가르쳐서, 숨겨있는 기억이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최면의 상태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치료사는 과거에 자신을 학대했던 예를 상세하게 기억하게끔 도움을 주었다. 몇 달 후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베스는 7살 때부터 8살까지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끔찍한 기억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녀를 두 번 임신시켰는데 첫 번째는 옷걸이를 이용하여 낙태시켰고 두 번째는 그녀 스스로 그러한 행동을 하게 했다. 베스의 아버지는 딸에게 성폭력을 가했다는 것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녀의 가족 대변인의 주장에 따라 베스는 부인과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베스는 한 번도 임신한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아직 성관계를 한 번도 갖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한 학대는 그녀가 회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발생하지 않았었다.[9]
실제로 1990년도 중반 무렵부터 미국의 심리치료사와 상담사들은 내담자들을 돌볼 때 여러 섭식장애나 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당했던 (실제로는 없었던) 성폭행이나 폭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무고로 이어졌다. 끌려온 아버지들은 입을 못 열었고, 그저 “무슨 죄로 여기 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모두 내 책임이다. 이 못난 아버지를 용서하고 다시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내자”는 말만 되풀이 했을 뿐이다. 사실 변호사도 이들을 위해서는 해줄 수 있는 조언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딸의 증언대로라면 그저 둘도 없는 딸을 강간한 추악한 아동 성범죄자, 상습적인 근친상간을 하면서도 태연하게 이중생활을 한 존재였다.
이후 엘리자베스 로프터스같은 기억심리학자들이 나서서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내놓고 증언하며, 무고를 당한 사람들을 돕게 되었다.[10] 로프터스는 사건을 처리한 후 피해자 아버지인 마이크의 증언을 인용한다.
만일 제 딸이 누군가에게 성폭행이나 강간을 당한다면 저는 그 가해자를 법이 허용하는 모든 죄목으로 고발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어떤 치료사가 내관(內觀)적인 치료 기술을 이용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을 제 딸의 머릿속에 만들어 낸다면 그 치료사도 성폭행 가해자와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셈이며 법이 허용하는 모든 죄목으로 고발되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지금 미국 전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거짓 고발 사건에는 3중의 비극이 존재합니다. 첫째, 진짜로 성추행을 당한 아이들에게 쓰여야 할 시간과 노력과 돈이 성추행을 당하지도 않은 아이들의 조사에 허비되고 있습니다. 둘째, 자신이 성추행당했다고 믿도록 유도된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일이 없었는데도 그런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무 죄 없이 파괴되는 가정이 많아지는 만큼 잘못 고발된 부모와 가족들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저는 성추행 피해자와 성추행을 당하지도 않았는데 당했다고 믿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잘못 고발된 사람들 모두에게 이로운 균형 있는 입법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11]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근친 성추행 피해자들이 트라우마의 오랜 기억과 상흔을 극복하도록 돕는 수많은 유능하고 헌신적인 치료사들의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의 목적이 심리치료 자체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심리치료의 허점을 밝히고 심리치료가 자신의 문제에 도움을 구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좀 더 도움이 되는 길을 제시하려는 것임을 그들이 이해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치료사가 아니며, 우리가 제기하는 비판은 어디까지나 기억 분야의 연구와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것임을 말해둔다.[12]
예를 하나 더 들자면, MBTI가 있다. 물론 MBTI는 완전한 엉터리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엄밀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과도 거리가 있다. 자기보고형 심리검사는 신뢰도가 낮다.[13] 게다가 MBTI의 해석에 이용되는 소위 '심리 역동 위계'(주기능, 부기능, 3차기능, 4차기능)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이 아니다.[14] 따라서 MBTI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완전히 신뢰하며 해석하는 것도 옳지 않다.[15]
이상과 같은 상황들. 즉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가장하지만 실제로 심리학이 아닌 것들을 제외하면, 사실 심리학과 기독교는 그렇게까지 반립하지도 않는다. 데이비드 마이어스는 이렇게 말한다.
심리 과학에 종사하는 우리는 때때로 이런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심리 과학에 대한 헌신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헌신을 도대체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습니까? (1) 심리 과학과 기독교는 잘 어울립니까? (2) 심리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를 지지합니까? (3)갈등하는 부분은 없습니까? 간단히 답해 보면 (1) 심리 과학과 기독교는 이가 딱 맞아떨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겸손한 믿음과 인간이 오류에 빠지기 쉽다고 하는 인식은 철저하고 편견 없는 과학을 향한 동기를 부여해 준다. (2) 심리 과학은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지혜를 많이 지지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 성경적 지혜라는 렌즈로 보든, 현대 심리 과학이라는 렌즈로 보든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3)심리 과학을 통해 발견된 것들은 몇몇 전통적 기독교 이해들에 이의를 제기한다. 항상 개혁되는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과 책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책 둘 다로부터 배우는데 언제나 개방적일 것이다.[16]
따라서 기독교인 역시 심리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를 멈추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겸손히 인식하는 기독교인과, 자신의 과학적 탐구를 겸허히 찾는 심리학자는 결국 같은 곳에 도달할 것이다.
2. 상담의 문제
그런데 문제는 상담에 있다. 진실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겸손한 심리학과 성경의 가르침은 상반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의 심리학은, 특히 상담심리는 세부적인 사항에서 부딪힐 일이 없지 않다. 예컨대,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담사 상당수가 이 진술을 내담자에게 직접적으로 하려고 한다면 난색을 표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은 사려 깊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이 진술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상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중요하다.
리더로서(상담자로서) - 상담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청중은 설교를 통해 이해한 진리를 깊이 내면화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못한다. 물론 소그룹, 지속적인 설교 듣기를 통해서 해소되는 부분이 있지만 불충분한 면이 있고, 불안이 전반적인 정서가 된 도시 사회에서는 상담의 필요가 더 높아진다.[17] 즉, 목회자들과 리더들은 정신질환과 성격장애에 대해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온 것이다.[18]
내담자로서 – 결국 상담자들은 배운 내용들을 근거로 해서 상담을 한다. 상담의 방향을 중립적으로 둔다고 하더라도, 어느 측면에서 결국 상담자는 권면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권면 이면에는 가치판단과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내담자로서, 언젠가는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
친구와 가족으로서 – 당신은 스스로 상담을 해주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렇다고 마냥 상담을 맡기기에는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분별이 필요하다.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어느 상담자를 만나야 할지, 상담자를 만나서 받은 충고를 수용하는 과정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3. 심리학적 상담을 지나치게 수용할 때의 문제점
A. 도덕적 가치판단의 문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중립적인 과학적 심리학의 불가능성을 증명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라.
어떤 시계를 좋다고 말하는 것은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시계를 원하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시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좋다'는 낱말을 사용할 수 있는 전제조전은 좋다 혹은 나쁘다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 모든 유형의 품목은 ―― 인격과 행위를 포함해서 ―― 실제로 어떤 구체적 목적 또는 기능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좋다고 명명하는 것은 결국 사실적 진술을 하는 것이다. 특정 행위가 정당하고 옳다고 명명하는 것은 바로 선한 사람이 그런 행위를 그러한 상황에서 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19]
즉,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야 한다. 데이비드 마이어스(David Myers)는 그의 저서들 중 한 책에서, 과학의 연구는 동성애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를 보여준다고 말한다.[20] 이는 만약 어떤 기독교인이 가진 동성애적 성향이 생물학적인 것이라면, 그 또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용납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중독 행동 또한 생물학적인 근거를 가진다는 것이 사실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 심리학은 내담자들이 중독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아마도 세속의 상담사는 중독 행동이 사람들에게 해악을 주지만, 동성애 행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영적인 것을 가로막는 해악에 대한 정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인본주의적인 세속적 심리학은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목적에 대한 가정들을 가득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심리학은 다른 대부분의 세계관들(기독교, 유교, 불교, 그리스도의 이원론, 그리고 그 외의 많은 것들)과는 또 다른 하나의 믿음이 기초가 된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세계관과 인간의 목적에 대한 그 가정들이 다른 모든 세계관들보다 더 특권을 받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심리학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으로 여기길 좋아하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담심리에 모든 것을 맡기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저는 1인칭의 죽음은 힘들지 않다고 말해요. 내가 죽으면 고통은 없으니까요.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거잖아요. 죽으면 고통이 없죠. 그러니 나의 죽음은 고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들 자살하는 게 힘들 것 같죠? 가령 10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다고 해 보세요. 올라가서 뛰어내리기까지만 힘들지 뛰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게 해결돼요. 죽으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아요. 만약에 떨어졌는데 아프면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 건 감각이 없다는 걸 의미해요. 시체를 발로 뻥 차 봐요. 죽은 사람이 아프다고 하나요? 아프다고 그러면 살아 있는 거예요. 설죽은 거죠. 죽으면 고통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희망이에요. 그래서 진짜 힘들면 자살을 하셔야 돼요. 진짜 고통스러워서 자살하는 사람이 그래서 생기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러분의 애인이나 아이가 죽어 있는 걸 봤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침에 눈 뜨는 게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자살하는 거예요. 누가 뭐라고 그러나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죽었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죽으면 모든 게 끝나요. 깔끔한 거예요. 힘드시면 자살하세요. 농담 아니에요. 이게 철학자로서 마지막 충고예요. 바둥바둥 살지 말고, 비루하게 살지 말고요. 아무리 해도 이 고통에서 빠져나갈 데가 없고 내일은 더 절망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비굴한 모습 보이지 않고 세상을 떠나는 건 행복한 거예요.[21]
당연하게도, 모든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상담을 잘못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없다면 이러한 상담이 궁극적으로 잘못이라는 근거를 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마이어스의 충고를 듣는 것이 유용하다.
궁극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을 심리학에 기대하지 마십시오. 러시아 소설가 레오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 같은 것 말입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내가 어떤 것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도 소용없게 되지도 좌절되지도 않는 어떤 목적이 내 삶에 존재하는가?" 그 대신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때, 왜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심리학이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심리학 연구가 대단히 흥미롭고 유용하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22]
B. 영혼의 문제 (유물론적 접근의 문제)
우리가 상담과 연관하여 흔히 하는 생각은, 일종의 신학적 전제와 배경이 있다.
흔히 하는 생각들
그 이면의 전제들
“성경은 영의 구원에 관해서 말해주는 거잖아. 정신적인 문제들은 심리학이 전문성이 있지.”
영과 혼은 분리되어 있고, 각자의 영역은 전혀 서로 연관을 주고받지 않는다.
“역기능적 감정의 문제는 생리적-신경과학적 문제야. 성경은 이 문제를 다루는 건 시대착오야.”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나 예배, 성경읽기 같은 방식의 답변은 곤란해. 그것은 종교적인 일이라고.”
경건생활의 방식이 효과가 있다는 증언은 모두 들어볼 것도 없이 거짓이며, 오직 과학적 연구로 입증된 것만이 진실이다.
당연히 위의 내용 이면의 전제들은 철학적/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으며, 입증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입증되지 않은 전제를 근거로 기도를 상담기술보다 앞세우는 것은 위험하다. 이 사례의 극단적인 경우는 바로 윌리엄 (William Sargant) 박사의 마음을 위한 전투』 (Battle for the Mind)라는 책에서 볼 수 있는 주장들이다.[23]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 그러한 상태는 잠시 정서적인 붕괴를 가져오고 그러한 정서적인 상태를 어떤 특별한 유의 설교를 통해서 웨슬리가 산출해내곤 했다. 이러한 현상들은 흔히 웨슬리가 그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득할 때 나타나곤 했다. 다시 말하면 청중들로 하여금 확실한 저주와 웨슬리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관을 받아들이는 것 둘 중 하나를 즉각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던 것이다. 그림을 그려주듯이 하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 지옥에서 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지를 상상케 했는데 그것은 현역에서 돌아온 군인을 치료하는 동안에 사용할 수 있는 상상, 곧 그 지대 군인이 자기 탱크 속에서 불타 죽어갈 위험에 직면하여서 빨리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암시를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데 그것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 기술이 놀랍도록 유사하게 보였다.[24]
이후 사전트는 여러 예시를 들지만, 그의 주장들은 마틴 로이드 존스에 의해 효과적으로 논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취급한다면 그 사실들은 사도 바울의 경우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의 경우에서 일어났던 일을 충분하게 설명해줍니다. 그들은 “예수와 그 부활'을 전파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돌아다녔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체험을 단순하게 전하거나 사람들에게 어떤 유형의 삶을 살라고 권고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들’을 설교했습니다.[25]
이렇듯, 심리학은 쉽게 유물론적 전제 위에서 영적인 체험 전체를 부정할 수 있다.
C. 해답으로서의 성경의 기능에 관한 문제
성경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 심리적 권면과 분석을 자세히 담고 있다. 사실상 수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치유되었고, 성경은 수많은 지혜를 담고 있다.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조던 B.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좋든 싫든 《성경》에 서구 문명의 근본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서구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선악, 도덕성, 가치관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성경》이 어떻게 쓰이고 만들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시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쓰거나 편집한 여러 저작을 한데 모아 놓은 모음집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성경》은 사실상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나 다름없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이야기들을 선별해서 연대순으로 일관되게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집단적 상상력이 불가해한 힘에 이끌려 기나긴 시간 동안 깊은 심연에서 끌어올린 지혜의 보고다. 주의 깊게 꼼꼼히 파헤쳐 보면,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가르침을 발견하게 된다.[26]
아래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성경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지혜를 담고 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지혜를 깊이 연구했다. 예를 들자면,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설교자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우울증과 지나친 슬픔에 대한 치료』(Preservatives against Melancholy and Overmuch Sorrow. Or the Cure of both by faith and physick)라는 설교를 했다.[27] 여기에서 백스터는 성경 여러 곳을 찾으며 우울증에는 네 가지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1) 생리적 2) 죄책감과 수치심 3) 정신적 또는 심리적 근거 4) 사탄과 귀신의 활동. 이는 인간을 전인(全人)적으로 관찰하는 훌륭한 관찰이다. 청교도들은 늘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치료했다. 심리학자 에릭 존슨의 말을 들어보라.
종교개혁 전통 안의 목회 심리학은 청교도와 경건주의 운동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리처드 백스터, 존 오웬, 조지 허버트, 윌리엄 로, 존 게르하르트,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존 뉴턴 같은 이들은-죄, 우울증, 확신, 그리고 영적 침체와 같은-심리 영적(phychospiritual) 문제들과, 영적 회복을 증진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방법에 대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중세 이후 가장 중요한 기독교 심리학 저술가로는 쇠렌 키에르케고르를 꼽을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몇몇 저술을 심리학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심리학적 저서 몇 권을 저술했다. 키에르케고르는 10여 년에 걸쳐 인격의 본질, 죄,불안과 절망, 무의식(프로이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체성, 그리고 인격의 성장과 영적 성장을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매우 뛰어나게(의도적으로, 혼란스럽게 다소 어지러운 방식으로)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키에르케고르는 심리학 이론과 치료에 있어 주된 현대적 접근법들 가운데 하나인 실존적 심리학의 아버지(물론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세속적 명칭을 완강히 거부했겠지만 말이다.)로 간주될 수 있는 유일한 기독교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심리학을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리고 이와 관련 문제들의 해결과 복락의 증진에 대한 엄밀한 탐구로 폭넓게 정의 내릴 수 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수세기 동안이나 심리학을 고안하고 실천해 온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진리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해 주셨다고 믿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특히 사람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사람은 죄인이고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곤경에서 구출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28]
D. 해답으로서의 공동체의 기능에 관한 문제
대상-관계(Object-Relations) 이론에서 모든 역기능적 감정의 문제들은 어린 시절의 부적절한 애착의 결과이다. 해결책은 한 사람의 과거 및 한 사람을 잘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과 직면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인지 작용을 무시한 채 사랑, 긍정적인 감정들, 관계들을 모든 치료의 열쇠로 강조한다. 이것이 사실이라 하자. 그렇다면 궁극적 치료는 단순한 상담이 될 수 없다(상담이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심리학은 더 대중적인 형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문제들은 낮은 자존감의 결과이고, 이는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반드시 당신의 가치와 진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는 우리가 나쁜 공동체의 산물이고, 오직 좋은 공동체에서만 치료를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에 대한 개인적인 회개를 통해 자신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분명히 우리는 죄된 행동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비성경적인 다른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목양 사역에서, 개인 상담에 능숙해지는 것만큼 훌륭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단지 개인의 행동들과 선택들을 통해서만 더 나아지려고 하는가? 혹은 왜 우리는 오직 상담사와의 좋은 관계를 통해서만 더 나아지려고 하는가? 거칠게 표현하면, 만약 우리가 한 공동체에서 망가졌다면, 우리는 오직 진리와 사랑의 관계를 모델로 보여주고 제공하는 한 공동체 안에 깊이 들어감으로써만 치료를 받게 것이다.
4. 심리학적 상담을 지나치게 거부할 때의 문제점
A. 율법주의적 실수
존 맥아더는 대단히 훌륭한 목회자이지만, 상담과 권면에 있어서 마음의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행동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띈다.
"정신적, 정서적 건강"이 새로운 유행어가 되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그것을 영적인 건강함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죄는 병으로 일컬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은 죄에는 회개가 아닌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습관적인 죄는 중독성 내지 강박성 행동이라고 일컬어지고 많은 이들이 그러한 행동에 대한 해결책은 도덕적 교정이 아닌 의학적 치료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인간적인 치료법은 영적으로 연약한 이들, 천박하거나 성경적 진리에 대해 무지하며 영적 성숙과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이르는 고난의 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불행한 결과는, 이들이 실제적인 성장을 사실상 가로막는 일부 유사 기독교적인 방법이나 돌팔이 같은 심리 치료에 스스로 의존함으로써 성장이 지체되어 계속 미성숙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29]
심리학적 접근법은 근본적인 문제가 정서(사랑의 결핍)에 있고 주요 해결책은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많은 성경적 상담사들은 순종을 강조한다. 종종 이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이는 보통 의지를 잘못된 행동에 대항시키고 올바른 행동 위에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런 목양적 접근법은 근본적인 문제가 의지(순종하지 않음)에 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접근법의 주요 해결책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멈추고 순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복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너무 피상적이다. 결국 내담자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단순히 의지력의 행사로써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접근법은 "영적인 양육"을 너무 좁게 정의하고, 한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영적으로 괜찮아. 이는 필시 내가 느끼는 바야."라고 결론을 내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은 우리에게 영적인 건강이 정서적인 건강을 포함함을 보여주었다. 당신은 올바른 것들을 잘못된 이유들과 동기들로 행하고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기독교인 상담사들은 "육체"를 죄된 행동에 성향화된 물리적인 몸으로 보아왔다. 이들은 몸을 올바르고 성경적인 행동의 패턴들에 다시 성향화시키는 자기 훈련을 조언한다. 이는 상담사들로 하여금 내담자의 과거, 감정들, 그리고 마음의 동기들을 무시하게 할 수 있다. 성경의 주해는 육체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복음을 믿는 것과 복음에 의해 우리의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들이 영향을 받는 것은 각각 별개의 일이다. 복음이 우리의 생각 안에 침투하고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그리고 이 일이 마침내 일어나면, 성령의 열매, 즉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기 절제 등(cf.갈라디아서 5:16-26)을 맺게 된다. 만약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영적인 건강"의 정의로 이해한다면, 정서적인 건강의 범주를 고안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변화된 마음으로 가는 궁극적인 열쇠는 회개이지만, 이는 단순히 의지를 피상적인 행동 패턴들에 대항시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회개가 아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회개는 불신앙을 회개하는 것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기저에 있는 자기구원전략을 회개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기뻐하지 못함을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기뻐하지 못함을 회개하는 것은 우리가 손가락 하나 움직여서 채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들과 씨름하는 일(taking on the gods)은 목회상담의 중요한 책임이다. 하나님으로 가장한 심리내면적인 구조와 힘, 이미지들과 직면하는 일과 개인의 삶 속에 사랑, 믿음 그리고 소망을 안겨 주는 일,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 실존의 지옥 같은 고통 속을 함께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장시키는 일이야말로 목회상담의 참된 복음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신들과 씨름하는 일은 목회상담의 가장 중요한 심장이요, 혼과 같은 것이다.[30]
B. 개인주의적 실수
모든 문제를 개인의 회개, 결정들, 행동들을 포함하는 해결책을 요구하는 개인중심적인 문제들로 정의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고립된 선택들의 산물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선택들을 통해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 반심리학적인 이론가들은 가족의 역사와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도 있지만, 이는 서구 개인주의의 실수일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단지 개인들로서 다루실 뿐 아니라 가족들로서 다루심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 사람의 가족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종종 그 사람 마음의 우상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우정과 공동체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일에 사용하시는 중요한 수단들이다. 우리는 건강한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으면, 경시하고 학대하는 부모의 영향들을 고칠 수 없다. 많은 이들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형성되고, 지원을 받고, 목양을 받는 교제와 공동체의 목양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
C. 환원주의적 실수
또 다른 흔한 오류는 한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육체적 요인들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가 화학적인 원인이 있고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고 믿는 환원주의에 빠질 수 없지만, 또한 모든 문제가 단지 영적인 훈련의 부족 때문이라고 믿는 환원주의에도 빠질 수 없다. 정신분열증, 양극성 조울증, 그리고 다른 많은 심리학적 문제들은 단지 대화 치료법이 아닌 의학적 치료를 요구하는 생리학적 문제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과로 때문에 지친 것일 수 있습니다. 일에 질린 것이 아니라 지친 것일 수 있습니다. 일을 너무 많이 하고ㅡ육적인 영역에서든 영적인 영역에서든 마찬가지입니다ㅡ에너지와 체력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지친 것일 수 있습니다. 계속 너무 열심히 일하거나 긴장한 상태로 일하면 힘들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이것이 문제의 원인일 때는 의학적인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구약성경에 눈에 띄는 예가 나옵니다. 갈멜 산에서 과도한 힘을 쏟은 엘리야가 영적 침체의 공격을 받아 로뎀 나무 밑에서 자기 연민에 빠졌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잠과 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다 주셨습니다! 영적인 도움을 주시기 전에 음식과 휴식부터 주신 것입니다.[31]
어쨌든 지금 우리 앞에 우리의 도움을 구하는 소위 '상담'을 청하는 환자나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떻게 시작하시겠습니까? 내가 항상 자문해 보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 육체적인 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문제의 원인이 모두 다 육체적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신경성' 이라고 판단될 경우 육체적인 원인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종종 그러한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예로 위대한 찰스 스펄전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지 않았다고 느끼거나 때로는 그가 복음 전파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느꼈을 때 주기적인 우울증 증상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그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통풍(gout, 痛風)으로 고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스펄전 목사님처럼 통풍에 걸려 있다면, 여러분 역시 때때로 우울증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육체적인 원인에서 생겨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32]
5. 균형 잡힌 접근법 및 ‘기독교적’ 방식의 상담방법
자. 그렇다면 균형 잡힌 접근법은 무엇일까? 이론적으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원한다. 학문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골 2:3),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언제나 수반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그 어떤 예술, 그 어떤 과학도 온전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신성을 더 나타내며, 하나님의 신성에 더 부합하며, 이전보다 더 하나님의 신성의 일부처럼 보일 것이다" (1980, 397).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심리학과 상담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이 그런 것처럼, 근본적으로 신앙적인 것이다. 심리학과 상담에 있어 우리 대화, 행동, 그리고 함께 하나님을 향해 가는 우리 여정 이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기를![33]
하지만 실제의 상담과 삶에서, 균형 잡힌 방식으로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가족에게 상담을 받도록 했는데 가족이 “교회의 전도사님이 제가 한 말이 저를 힘들게 했어요.”라고 말한 것에 대해 상담자가 “그렇다면 그 전도사님을 더 이상 만나지 마세요.”라고 답했다 하자. 이 경우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상담자의 권면을 수용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상담자의 말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성경의 권면에 대항하는 것일 수 있고, 그러한 권면이 전적으로 내담자(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당장 상담을 그만두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본다. 그리고 종종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기 위해서 잠깐 교회를 안 나가게 하는 건 어떨까요?”라는 대답이 지혜롭지 않을 수도, 귀찮아서 미루는 것일 수도, 진짜 지혜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본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몇 가지 지침을 보자.
첫째,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라.
사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라. 다음의 말씀도 읽어보라.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치료하실 수 있다. 기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둘째, 겸손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심리와 상담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겸손한 전문지식인들은 현대에 너무나도 필요하다. 당신이 상담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면, 겸허히 성경을 지속적으로 배울 것을 권한다. 당신이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마치 의학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적 선물인 상담을 지혜롭게 활용하라. 겸허히 배울 것을 배우고 수용하라. 하지만 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라. 그렇다면 우리는 접점을 찾을 것이다.
셋째, 심리학을 배우는 사람은, 겸허하고 진지하게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성경과 반대되는 주장을 할 때, 그가 정말 과학적인 주장을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힌 종교/철학적 주장을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심리학의 오해』에서 그토록 과학적인 방법을 주장했던 키이스 스타노비치도, 같은 책에서 자신의 종교적 편견에 근거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를 제외하고 모든 것에 과학적이다! 다음을 보라.
물론 종교가 환경에 수반되는 신념의 고전적 사례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예컨대, 기독교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이슬람교는 아프리카와 중동에, 그리고 힌두교는 인도에 밀집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와 동료들은 여러 연구에서 대학생 집단의 대략 40~45%가 자신의 종교적 견해는 역사적 상황(부모, 국가, 교육 등)에 의해서 조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결과를 반복적으로 얻어왔다.[34]
스타노비치는 놀랍도록 기독교에 무지하다! 스타노비치가 이 책을 쓸 당시 이미 남반구의 기독교 인구가 북반구를 추월한 상태였다! 현재 기독교인은 북반구에 8억3,780만 9천명, 남반구에 17억2,206만 6천명이다.[35] 이미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가 되었다. 사실 심리학자들이 심리학 자체의 도그마에 갇혀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심리학자 스스로의 연구에 의해 대부분 논박되었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의 무신론 주장은, 뉴욕대학교의 심리학자 폴 비츠에 의해 효과적으로 논박되었다.[36]
따라서 진정한 심리학이라면, 기독교를 공격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의 저명한 심리학 교수인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역사를 통해서 종교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결속시키고 우주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종교적 믿음을 계속 갖고 있기 때문에 현대 사회가 세속회되었다는 것은 과장되었다. 그러나 종교는 사회와 일상생활에서 그 중심적 위치를 잃었으며, 특히 교육받은 계층이 종교적 믿음을 상실하였다. 과학은 사람들이 환경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하는데 종교보다 효과적이라고 입증되었지만, 종교만큼 효과적으로 의미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현대의 무신론적이거나 불가지론적인 개인은 우리의 독실한 조상들과 비교하여 인생을 의미가 있는 것으로 믿는데 큰 어려움이 있다. 차이는 감정을 조절하는데 미치는 의미의 영향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종교는 사람들이 불운의 의미를 발견하여 그에 대처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과학적 이해는 같은 위안을 제공할 수 없다. 따라서 종교적 믿음의 감퇴는 사람들이 스트레스와 외상에서 회복하기가 더 힘들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37]
결론 – 복음만이 할 수 있는 일
복음은 심리학이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하버드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는 뉴올리언스의 루비 브리지스를 만난 이야기를 해준다. 1960년 뉴올리언스 연방 법원은 백인 전용 초등학교에 흑인 학생을 입학시키도록 했고, 루비는 백인 전용 초등학교인 윌리엄 프란츠 학교에 들어갔다. 성난 군중은 분노했고, 1년 동안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했다. 무리는 등교하는 루비에게 욕설을 하고 주먹으로 치려 했으며, 루비는 보안관을 대동해야 등교할 수 있었다. 콜스는 루비를 관찰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루비는 잘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루비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저희가 루비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이야기해주었어요."
루비는 자신의 기도 목록에 그 사람들을 올려놓고 매일 밤 기도한다고 했다.
"정말 그러니, 루비? 그들을 위해 밤마다 기도한다고?"
"네, 그럼요."
"도대체 왜 그런 기도를 하지?"
"음, 그들에게는 기도가 필요해요."
루비는 주일학교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녀가 다니는 침례교회의 목사님 또한 그들을 위한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매주일 공개석상에서 말이다.
루비의 어머니와 이야기한 후 나는 루비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런 지나친 기도를 루비에게 요구하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저는 이제야 루비가 어떤 일을 겪는지 알았습니다."
내가 그 말을 하자 그들은 나를 아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브리지스 부인이 먼저 말했다.
"저희는 아이에게 상처를 받게 하려고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모두가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루비도 마찬가지고요."
그녀는 내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들에게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가요?"
"필요합니다. 저도 그 부분은 동의해요. 하지만 그들을 위한 기도를 루비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 아닌가요?"[38]
이후 로버트 콜스는 혼란에 빠졌다. 이 모든 상황이 심리학자/정신과 의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1960년대에 남부지방 흑인으로 매우 가난하게 태어난 아이들을 테네시의 리틀록과 클린턴, 이후 애틀랜타 등지에서 많이 알게 되었는데, 루비를 비롯한 그 아이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폭도들을 위해 기도했다. 대체 그들을 기도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존엄성? 기도의 존엄함? 그 일이 있은 지 몇 주 후에 나는 다시 루비에게 기도에 관한 질문을 했다.
"나는 아직도 너의 기도가 혼란스럽구나. 대체 너는 왜 너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니?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음 그것은 특별히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왜 네가 특별히 해야 하지?"
"만약 그 사람들이 아저씨에게도 저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아저씨 역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니까요."
루비는 나에게 주일학교에서 배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예수님은 사람들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럴 때마다 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세요. 저들은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하는 기도를 했다"고 목사님이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비는 그 예수의 가르침을 자기가 살고 있는 1960년대 뉴올리언스의 거리에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한 일을 내가 심리학적으로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줄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보았다. 루비의 가족을 마조히스트(masochist)로 취급해야 하는가? 아니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한 용서를 구할 때 거기에 담긴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해석한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랬을까?
루비는 도덕적 분석학이나 윤리학에 대해서는 당연히 배우지 못했다. 물론 우리가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책들도 읽지 못했다. 그러나 루비는 레드넥 사이를 기도하면서 지나갔다. 그것도 매일을 말이다. 학교는 1년이 지나서야 마지못해 인종차별대우를 폐지했고, 그래도 그녀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가 갈릴리에서 가르치셨던 성경의 이야기를 인용했다.
많은 상담심리학자는 심리상담이 자기연민을 부추기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심히 염려한다.[39] 아무리 심리학이 자기연민을 경고해도, 용서를 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심리학자라면,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 자신을 향해 조롱하고 침을 뱉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구주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루비와 같은 사람. 자신을 향해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말하는 사람. 총기난사범을 향해 용서한다고 말하고 범인의 장례식에 참여하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사람들. “그것은 단지 평범한 크리스천의 용서입니다. 즉 크리스천이면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40]
그리스도인과 심리학 – 일과 신앙 프로젝트
- 그리스도인들은 심리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정규 (시광교회)
서론
1. 심리학과 심리학이 아닌 것
2. 상담의 문제
3. 심리학적 상담을 지나치게 수용할 때의 문제점
4. 심리학적 상담을 지나치게 거부할 때의 문제점
5. 균형 잡힌 접근법 및 '기독교적' 방식
결론
서론 – 심리학과 기독교를 다루기 전에
이 간단한 해설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일 수도 있다. 사실 심리학에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분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론토 대학의 응용심리학자이자, 『심리학의 오해』라는 걸출한 개론서를 쓴 키이스 E. 스타노비치는 이러한 다양성이 “하나의 학문영역으로서 심리학의 응집성을 현저하게 감소시키고 있다.”고 말한다.[1] 또한 헨리 글라이트만은 심리학의 범위를 가리켜 “한 쪽 끝은 생물과학의 영역에서부터 다른 한 쪽 끝은 사회과학의 영역과 경계를 이루는 엉성하게 결합된 지적 왕국”이라고 말한다.[2] 실제로 미국심리학회(APA,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에 등록된 분과만 해도 54개 영역이다.
따라서 나는 대체로 텍스트북 선에서의 정의를 바탕으로 하여 심리학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플로리다 대학의 인지심리학자인 리차드 그릭스(Richard A. Griggs)는 심리학을 “행동과 정신과정,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상호과정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정의한다.[3] 핵심은 과학이다. 심리학은 다음의 네 가지 관점에서 행동과 정신과정을 살펴본다.[4]
연구관점
강조점
생물적
인간의 생리 (특히 뇌와 신경계)가 인간 행동 및 정신과정을 유발하는 방식과 유전과 진화가 인간의 생리에 미치는 영향
인지적
지각, 기억, 문제해결과 같은 인간의 정신과정이 작동하는 방식과 이들 과정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
행동적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일/사건이 관찰 가능한 행동을 조건화하는 방식
사회문화적
다른 사람과 문화적 맥락이 인간 행동 및 정신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사실 이 지점에서 심리학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심리학은 종종, 아니 자주 기독교와 갈등을 빚어 왔다. 성경은 인간의 심리를 다루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반대는 기독교 쪽에서 먼저 시작한 면이 있다. 100년 전만 해도 캠브리지 대학교는 정신물리학 실험실을 설치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이 주제의 연구가 "인간의 정신을 저울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종교를 모독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5]
물론 심리학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프로이트는 종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술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 개념은 다른 모든 문명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 것과 똑같은 욕구로부터 생겨났다. 즉, 자연의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필요에서 나온 것이다.”[6] 이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특히 종교적인 회심을 심리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가 있어왔고, 그것은 기독교 교회와 지속적 갈등을 빚어왔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이후 기독교인들과 심리학자들에게 의해 효과적으로 논박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와 심리학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개관과 정리를 해보고, 기독교인들이 어떤 자세를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 심리학을 좀 더 명료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심리학과 심리학이 아닌 것
이 영역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설명을 제공한 사람은 위에 이미 언급한 키이스 스타노비치일 것이다. 그는 『심리학의 오해』의 초반부에서 우선 프로이트에 대한 아주 긴 비평을 이야기하면서, 프로이트가 제기한 많은 주장에 대해 대다수의 심리학자들은 기각하였다고 말해주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이라고 생각하는 대중적으로 떠도는 이야기들이 사실상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심리학이 아님을 말해준다.
잘못된 심리학적 지식으로 인해 선무당이 사람 잡는 예는 얼마든지 있고, 이는 아주 심각한 상황까지 간 적도 있다. 아래 사례를 보라.
실제로 1990년도 중반 무렵부터 미국의 심리치료사와 상담사들은 내담자들을 돌볼 때 여러 섭식장애나 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당했던 (실제로는 없었던) 성폭행이나 폭행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무고로 이어졌다. 끌려온 아버지들은 입을 못 열었고, 그저 “무슨 죄로 여기 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모두 내 책임이다. 이 못난 아버지를 용서하고 다시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내자”는 말만 되풀이 했을 뿐이다. 사실 변호사도 이들을 위해서는 해줄 수 있는 조언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딸의 증언대로라면 그저 둘도 없는 딸을 강간한 추악한 아동 성범죄자, 상습적인 근친상간을 하면서도 태연하게 이중생활을 한 존재였다.
이후 엘리자베스 로프터스같은 기억심리학자들이 나서서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조작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내놓고 증언하며, 무고를 당한 사람들을 돕게 되었다.[10] 로프터스는 사건을 처리한 후 피해자 아버지인 마이크의 증언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근친 성추행 피해자들이 트라우마의 오랜 기억과 상흔을 극복하도록 돕는 수많은 유능하고 헌신적인 치료사들의 노고에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의 목적이 심리치료 자체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심리치료의 허점을 밝히고 심리치료가 자신의 문제에 도움을 구하고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좀 더 도움이 되는 길을 제시하려는 것임을 그들이 이해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치료사가 아니며, 우리가 제기하는 비판은 어디까지나 기억 분야의 연구와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나온 것임을 말해둔다.[12]
예를 하나 더 들자면, MBTI가 있다. 물론 MBTI는 완전한 엉터리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엄밀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과도 거리가 있다. 자기보고형 심리검사는 신뢰도가 낮다.[13] 게다가 MBTI의 해석에 이용되는 소위 '심리 역동 위계'(주기능, 부기능, 3차기능, 4차기능)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이 아니다.[14] 따라서 MBTI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은 좋지만, 완전히 신뢰하며 해석하는 것도 옳지 않다.[15]
이상과 같은 상황들. 즉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가장하지만 실제로 심리학이 아닌 것들을 제외하면, 사실 심리학과 기독교는 그렇게까지 반립하지도 않는다. 데이비드 마이어스는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인 역시 심리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를 멈추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겸손히 인식하는 기독교인과, 자신의 과학적 탐구를 겸허히 찾는 심리학자는 결국 같은 곳에 도달할 것이다.
2. 상담의 문제
그런데 문제는 상담에 있다. 진실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겸손한 심리학과 성경의 가르침은 상반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의 심리학은, 특히 상담심리는 세부적인 사항에서 부딪힐 일이 없지 않다. 예컨대,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상담사 상당수가 이 진술을 내담자에게 직접적으로 하려고 한다면 난색을 표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것은 사려 깊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이 진술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상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중요하다.
리더로서(상담자로서) - 상담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청중은 설교를 통해 이해한 진리를 깊이 내면화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못한다. 물론 소그룹, 지속적인 설교 듣기를 통해서 해소되는 부분이 있지만 불충분한 면이 있고, 불안이 전반적인 정서가 된 도시 사회에서는 상담의 필요가 더 높아진다.[17] 즉, 목회자들과 리더들은 정신질환과 성격장애에 대해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온 것이다.[18]
내담자로서 – 결국 상담자들은 배운 내용들을 근거로 해서 상담을 한다. 상담의 방향을 중립적으로 둔다고 하더라도, 어느 측면에서 결국 상담자는 권면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권면 이면에는 가치판단과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내담자로서, 언젠가는 가치판단을 해야 한다.
친구와 가족으로서 – 당신은 스스로 상담을 해주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렇다고 마냥 상담을 맡기기에는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분별이 필요하다.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어느 상담자를 만나야 할지, 상담자를 만나서 받은 충고를 수용하는 과정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3. 심리학적 상담을 지나치게 수용할 때의 문제점
A. 도덕적 가치판단의 문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중립적인 과학적 심리학의 불가능성을 증명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라.
즉,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야 한다. 데이비드 마이어스(David Myers)는 그의 저서들 중 한 책에서, 과학의 연구는 동성애에 대한 생물학적 근거를 보여준다고 말한다.[20] 이는 만약 어떤 기독교인이 가진 동성애적 성향이 생물학적인 것이라면, 그 또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용납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중독 행동 또한 생물학적인 근거를 가진다는 것이 사실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현대 심리학은 내담자들이 중독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아마도 세속의 상담사는 중독 행동이 사람들에게 해악을 주지만, 동성애 행동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잠깐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영적인 것을 가로막는 해악에 대한 정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인본주의적인 세속적 심리학은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목적에 대한 가정들을 가득 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속적 심리학은 다른 대부분의 세계관들(기독교, 유교, 불교, 그리스도의 이원론, 그리고 그 외의 많은 것들)과는 또 다른 하나의 믿음이 기초가 된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세계관과 인간의 목적에 대한 그 가정들이 다른 모든 세계관들보다 더 특권을 받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심리학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과학으로 여기길 좋아하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담심리에 모든 것을 맡기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모든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상담을 잘못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없다면 이러한 상담이 궁극적으로 잘못이라는 근거를 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마이어스의 충고를 듣는 것이 유용하다.
B. 영혼의 문제 (유물론적 접근의 문제)
우리가 상담과 연관하여 흔히 하는 생각은, 일종의 신학적 전제와 배경이 있다.
흔히 하는 생각들
그 이면의 전제들
“성경은 영의 구원에 관해서 말해주는 거잖아. 정신적인 문제들은 심리학이 전문성이 있지.”
영과 혼은 분리되어 있고, 각자의 영역은 전혀 서로 연관을 주고받지 않는다.
“역기능적 감정의 문제는 생리적-신경과학적 문제야. 성경은 이 문제를 다루는 건 시대착오야.”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도나 예배, 성경읽기 같은 방식의 답변은 곤란해. 그것은 종교적인 일이라고.”
경건생활의 방식이 효과가 있다는 증언은 모두 들어볼 것도 없이 거짓이며, 오직 과학적 연구로 입증된 것만이 진실이다.
당연히 위의 내용 이면의 전제들은 철학적/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으며, 입증될 수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입증되지 않은 전제를 근거로 기도를 상담기술보다 앞세우는 것은 위험하다. 이 사례의 극단적인 경우는 바로 윌리엄 (William Sargant) 박사의 마음을 위한 전투』 (Battle for the Mind)라는 책에서 볼 수 있는 주장들이다.[23]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후 사전트는 여러 예시를 들지만, 그의 주장들은 마틴 로이드 존스에 의해 효과적으로 논박되었다.
이렇듯, 심리학은 쉽게 유물론적 전제 위에서 영적인 체험 전체를 부정할 수 있다.
C. 해답으로서의 성경의 기능에 관한 문제
성경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킨 심리적 권면과 분석을 자세히 담고 있다. 사실상 수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치유되었고, 성경은 수많은 지혜를 담고 있다.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조던 B.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아래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성경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지혜를 담고 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지혜를 깊이 연구했다. 예를 들자면,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설교자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우울증과 지나친 슬픔에 대한 치료』(Preservatives against Melancholy and Overmuch Sorrow. Or the Cure of both by faith and physick)라는 설교를 했다.[27] 여기에서 백스터는 성경 여러 곳을 찾으며 우울증에는 네 가지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 1) 생리적 2) 죄책감과 수치심 3) 정신적 또는 심리적 근거 4) 사탄과 귀신의 활동. 이는 인간을 전인(全人)적으로 관찰하는 훌륭한 관찰이다. 청교도들은 늘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치료했다. 심리학자 에릭 존슨의 말을 들어보라.
D. 해답으로서의 공동체의 기능에 관한 문제
대상-관계(Object-Relations) 이론에서 모든 역기능적 감정의 문제들은 어린 시절의 부적절한 애착의 결과이다. 해결책은 한 사람의 과거 및 한 사람을 잘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과 직면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인지 작용을 무시한 채 사랑, 긍정적인 감정들, 관계들을 모든 치료의 열쇠로 강조한다. 이것이 사실이라 하자. 그렇다면 궁극적 치료는 단순한 상담이 될 수 없다(상담이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심리학은 더 대중적인 형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문제들은 낮은 자존감의 결과이고, 이는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반드시 당신의 가치와 진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는 우리가 나쁜 공동체의 산물이고, 오직 좋은 공동체에서만 치료를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죄에 대한 개인적인 회개를 통해 자신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분명히 우리는 죄된 행동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비성경적인 다른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목양 사역에서, 개인 상담에 능숙해지는 것만큼 훌륭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단지 개인의 행동들과 선택들을 통해서만 더 나아지려고 하는가? 혹은 왜 우리는 오직 상담사와의 좋은 관계를 통해서만 더 나아지려고 하는가? 거칠게 표현하면, 만약 우리가 한 공동체에서 망가졌다면, 우리는 오직 진리와 사랑의 관계를 모델로 보여주고 제공하는 한 공동체 안에 깊이 들어감으로써만 치료를 받게 것이다.
4. 심리학적 상담을 지나치게 거부할 때의 문제점
A. 율법주의적 실수
존 맥아더는 대단히 훌륭한 목회자이지만, 상담과 권면에 있어서 마음의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행동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띈다.
심리학적 접근법은 근본적인 문제가 정서(사랑의 결핍)에 있고 주요 해결책은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많은 성경적 상담사들은 순종을 강조한다. 종종 이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이는 보통 의지를 잘못된 행동에 대항시키고 올바른 행동 위에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런 목양적 접근법은 근본적인 문제가 의지(순종하지 않음)에 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접근법의 주요 해결책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멈추고 순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복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너무 피상적이다. 결국 내담자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단순히 의지력의 행사로써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접근법은 "영적인 양육"을 너무 좁게 정의하고, 한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영적으로 괜찮아. 이는 필시 내가 느끼는 바야."라고 결론을 내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은 우리에게 영적인 건강이 정서적인 건강을 포함함을 보여주었다. 당신은 올바른 것들을 잘못된 이유들과 동기들로 행하고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기독교인 상담사들은 "육체"를 죄된 행동에 성향화된 물리적인 몸으로 보아왔다. 이들은 몸을 올바르고 성경적인 행동의 패턴들에 다시 성향화시키는 자기 훈련을 조언한다. 이는 상담사들로 하여금 내담자의 과거, 감정들, 그리고 마음의 동기들을 무시하게 할 수 있다. 성경의 주해는 육체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지지하지 않는다.
복음을 믿는 것과 복음에 의해 우리의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들이 영향을 받는 것은 각각 별개의 일이다. 복음이 우리의 생각 안에 침투하고 우리의 생각을 주관하는 데는 수년이 걸린다. 그리고 이 일이 마침내 일어나면, 성령의 열매, 즉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기 절제 등(cf.갈라디아서 5:16-26)을 맺게 된다. 만약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영적인 건강"의 정의로 이해한다면, 정서적인 건강의 범주를 고안해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변화된 마음으로 가는 궁극적인 열쇠는 회개이지만, 이는 단순히 의지를 피상적인 행동 패턴들에 대항시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회개가 아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회개는 불신앙을 회개하는 것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기저에 있는 자기구원전략을 회개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기뻐하지 못함을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기뻐하지 못함을 회개하는 것은 우리가 손가락 하나 움직여서 채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B. 개인주의적 실수
모든 문제를 개인의 회개, 결정들, 행동들을 포함하는 해결책을 요구하는 개인중심적인 문제들로 정의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고립된 선택들의 산물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의 선택들을 통해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 반심리학적인 이론가들은 가족의 역사와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도 있지만, 이는 서구 개인주의의 실수일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단지 개인들로서 다루실 뿐 아니라 가족들로서 다루심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 사람의 가족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종종 그 사람 마음의 우상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우정과 공동체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일에 사용하시는 중요한 수단들이다. 우리는 건강한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으면, 경시하고 학대하는 부모의 영향들을 고칠 수 없다. 많은 이들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형성되고, 지원을 받고, 목양을 받는 교제와 공동체의 목양적 중요성을 과소평가한다.
C. 환원주의적 실수
또 다른 흔한 오류는 한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육체적 요인들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가 화학적인 원인이 있고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고 믿는 환원주의에 빠질 수 없지만, 또한 모든 문제가 단지 영적인 훈련의 부족 때문이라고 믿는 환원주의에도 빠질 수 없다. 정신분열증, 양극성 조울증, 그리고 다른 많은 심리학적 문제들은 단지 대화 치료법이 아닌 의학적 치료를 요구하는 생리학적 문제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말한다.
5. 균형 잡힌 접근법 및 ‘기독교적’ 방식의 상담방법
자. 그렇다면 균형 잡힌 접근법은 무엇일까? 이론적으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의 상담과 삶에서, 균형 잡힌 방식으로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가족에게 상담을 받도록 했는데 가족이 “교회의 전도사님이 제가 한 말이 저를 힘들게 했어요.”라고 말한 것에 대해 상담자가 “그렇다면 그 전도사님을 더 이상 만나지 마세요.”라고 답했다 하자. 이 경우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상담자의 권면을 수용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상담자의 말을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성경의 권면에 대항하는 것일 수 있고, 그러한 권면이 전적으로 내담자(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당장 상담을 그만두게 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본다. 그리고 종종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기 위해서 잠깐 교회를 안 나가게 하는 건 어떨까요?”라는 대답이 지혜롭지 않을 수도, 귀찮아서 미루는 것일 수도, 진짜 지혜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본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몇 가지 지침을 보자.
첫째,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라.
사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라. 다음의 말씀도 읽어보라.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6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치료하실 수 있다. 기도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둘째, 겸손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심리와 상담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겸손한 전문지식인들은 현대에 너무나도 필요하다. 당신이 상담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면, 겸허히 성경을 지속적으로 배울 것을 권한다. 당신이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마치 의학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적 선물인 상담을 지혜롭게 활용하라. 겸허히 배울 것을 배우고 수용하라. 하지만 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으라. 그렇다면 우리는 접점을 찾을 것이다.
셋째, 심리학을 배우는 사람은, 겸허하고 진지하게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성경과 반대되는 주장을 할 때, 그가 정말 과학적인 주장을 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힌 종교/철학적 주장을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심리학의 오해』에서 그토록 과학적인 방법을 주장했던 키이스 스타노비치도, 같은 책에서 자신의 종교적 편견에 근거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를 제외하고 모든 것에 과학적이다! 다음을 보라.
스타노비치는 놀랍도록 기독교에 무지하다! 스타노비치가 이 책을 쓸 당시 이미 남반구의 기독교 인구가 북반구를 추월한 상태였다! 현재 기독교인은 북반구에 8억3,780만 9천명, 남반구에 17억2,206만 6천명이다.[35] 이미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가 되었다. 사실 심리학자들이 심리학 자체의 도그마에 갇혀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심리학자 스스로의 연구에 의해 대부분 논박되었다. 예를 들면 프로이트의 무신론 주장은, 뉴욕대학교의 심리학자 폴 비츠에 의해 효과적으로 논박되었다.[36]
따라서 진정한 심리학이라면, 기독교를 공격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의 저명한 심리학 교수인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결론 – 복음만이 할 수 있는 일
복음은 심리학이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하버드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는 뉴올리언스의 루비 브리지스를 만난 이야기를 해준다. 1960년 뉴올리언스 연방 법원은 백인 전용 초등학교에 흑인 학생을 입학시키도록 했고, 루비는 백인 전용 초등학교인 윌리엄 프란츠 학교에 들어갔다. 성난 군중은 분노했고, 1년 동안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했다. 무리는 등교하는 루비에게 욕설을 하고 주먹으로 치려 했으며, 루비는 보안관을 대동해야 등교할 수 있었다. 콜스는 루비를 관찰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루비는 잘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루비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이후 로버트 콜스는 혼란에 빠졌다. 이 모든 상황이 심리학자/정신과 의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많은 상담심리학자는 심리상담이 자기연민을 부추기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심히 염려한다.[39] 아무리 심리학이 자기연민을 경고해도, 용서를 말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심리학자라면, 그들을 용서하기 위해 죽으신, 자신을 향해 조롱하고 침을 뱉는 사람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구주가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루비와 같은 사람. 자신을 향해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말하는 사람. 총기난사범을 향해 용서한다고 말하고 범인의 장례식에 참여하며 유족들을 위로하는 사람들. “그것은 단지 평범한 크리스천의 용서입니다. 즉 크리스천이면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40]
1. 키이스 스타노비치, 『심리학의 오해』, 신현정 옮김 (서울: 혜안, 2013), p. 32.
2. Gleitman, Henry. Psychology, (New York: Norton & Company, 1981), p. 774.
3. Richard A. Griggs, 『심리학과의 만남』, 제6판, 신성관 외 2인 옮김 (서울: 시그마프레스, 2022), p. 3
4. 위의 책, p 9.
5. Hearst, Elliot, ed. The First Century of Experimental Psychology. (New York: Routledge, 2019.), p. 7.
6. 지크문트 프로이트, 『한 권으로 읽는 프로이트』, 임홍빈 박종대 옮김 (서울: 열린책들, 2019), p.
7. 키이스 스타노비치, 『심리학의 오해』, pp. 9-10.
8. 데이비드 G. 마이어스, 네이선 드월, 『마이어스의 심리학 개론』, 제13판, 신현정, 김비아 옮김, (서울: 시그마프레스, 2022), pp. 24-25.
9. Mark A. Gluck,Catherine E. Myers,Eduardo Mercado, 『학습과 기억 – 뇌에서 행동까지』, 제3판, 김현택 외 3인 옮김 (서울: 시그마프레스, 2019), p. 483.
10. 이 자세한 과정은 다음 책을 참조하라. 캐서린 케첨,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우리 기억은 진짜 기억일까?』, 정준형 옮김 (서울: 도솔, 2008)
11. 위의 책, pp. 342-343.
12. 위의 책, p.
13. Randall, Ken, Mary Isaacson, and Carrie Ciro. “Validity and Reliability of the Myers-Briggs Personality Type Indicator: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Journal of Best Practices in Health Professions Diversity 10, no. 1 (2017): 1–27.
14. Reynierse, James H.. “The Case Against Type Dynamics.” (2008).
15. 다음을 참조하라. https://brunch.co.kr/@kuy06154/4
16. 에릭 존슨 외, 『심리학과 기독교 어떤 관계인가』, 김찬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p. 60.
17.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 사회』, 송영배 (서울: 이학사, 2019)를 보라.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지배정서인 불안의 이유와 그 사상적 근거를 이해할 수 있다.
18. DSM-5는 꼭 구비해 놓는 것이 좋다.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DSM-5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권준수 옮김 (서울: 학지사, 2015)
19. 알리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이진우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7), p. 99.
20. David G. Myers, Exploring Psychology (New York: Macmillan, 2004), 368.
21. 강신주, 『강신주의 다상담 3』, (서울: 동녘, 2013), pp. 419-420.
22. 데이비드 G. 마이어스, 네이선 드월, 『마이어스의 심리학 개론』, pp. 9-10.
23. William Sargant, Battle for the Mind: A Physiology of Conversion and Brainwashing. (London: Heinemann, 1957).
24. 위의 책, p. 22.
25. 마틴 로이드 존스, 『시대의 표적』, 서문강 옮김 (서울:CLC, 1993.), p. 107.
26. 조던 피터슨, 『12가지 인생의 법칙』, 강주헌 옮김 (서울: 메이븐, 2018), p. 161.
27. Richard Baxter and William Orme, “CURE OF MELANCHOLY AND OVERMUCH SORROW, BY FAITH AND PHYSIC” in The Practical Works of the Rev. Richard Baxter, vol. 17 (London: James Duncan, 1830), pp. 236-285.
28. 에릭 존슨 외, 『심리학과 기독교 어떤 관계인가』, pp. 19-20.
29. 존 맥아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8), p. 64.
30. Merle R. Jordan, 『신들과 씨름하다』, 권수영 옮김 (서울: 학지사, 2010), pp. 20-21.
31. 마틴 로이드 존스, 『영적 침체』, 정상윤 옮김 (서울: 복 있는 사람, 2014), p. 277.
32. 마틴 로이드 존스, 『의학과 치유』, 정득실 옮김 (서울: 생명의말씀사, 2003), pp. 197-199.
33. 에릭 존슨 외, 『심리학과 기독교 어떤 관계인가』, pp. 443-444.
34. 키이스 스타노비치, 『심리학의 오해』, p. 81.
35. https://worldchristiandatabase.org/ 참조.
36. 폴 비츠, 『무신론의 심리학』, 김요한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
37. Roy Baumeister, 『인생의 의미』, 김성일 옮김 (서울: 원미사, 2010), p. 218.
38. pp. 57-58.
39. 대표적으로, Wallach, Michael A. & Wallach, Lise (1983). Psychology's Sanction for Selfishness the Error of Egoism in Theory and Therapy. W H Freeman & Company.를 보라. 데이비드 브룩스, 『인간의 품격』, 김희정 옮김 (서울: 부키, 2015)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목록에 대해서는 폴 비츠, 『신이 된 심리학』, 장혜영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0), pp. 11-13을 보라.
40. 도널드 크레이빌, 스티븐 놀트, 데이빗 웨버 제커, 『아미시 그레이스』, 김재일 옮김 (서울: 뉴스앤조이, 2009), p.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