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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규 목사의 블로그입니다. 이정규 목사가 사역을 하면서 정리한 아이디어들을 칼럼 형식으로 제공합니다. 교회를 섬기는 많은 동역자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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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정서 1 – 왜 우리는 설교시의 정서 표현을 다루어야 하는가

이정규
2023-03-07
조회수 3129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신이 듣는 설교의 성격과 결부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있다. 설교의 내용만이 아니라 정신과 분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가늠한다. 설교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개적이고도 주된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설교자의 시각이 왜곡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 편협한 마음이 성부의 마음을 설명하는 분위기를 오염하고 있다면? 죄로 망가지고 수치심으로 가득하며 무력감을 느끼고 잘못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 고백의 교리만 강해할 뿐 복음의 은혜와, 죄인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성부를 보여주지 못하는 설교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하늘 아버지다.[1]

 

남침례교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였던 에드윈 C. 다간은 윗필드의 설교를 가리켜 "사도 시대 이후 설교의 역사에 조지 윗필드보다 더 위대하거나 더 가치 있는 이름은 없다"라고 말한다.[2] 하지만 신광은 목사는 윗필드의 설교 방식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그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에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말만 해도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윗필드가 ‘숫자’와 ‘규모’를 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사역했던 대중 운동가다. 대중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알았던 근대 거인주의의 시조로, 카리스마적 종교 지도자의 모범이요, 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원천이다.”[3]라고 말하며 심하게 비판한다.

 

이는 좋은 논쟁거리이다. 우리는 모두 설교자의 정서 표현이 설교에 영향을 어느 정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여기에는 연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윗필드는 어렸을 때에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고, 연기력 역시 꽤나 좋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그렇다면 그의 설교는 연기일 뿐인가? 또는, 설교자의 감정 표현은 연기일 수 있으니 그저 자제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윗필드 본인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켄터베리 대주교와 버터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배우의 대화를 언급한다.

 

어느 날 대주교는 버터톤 씨에게 물었습니다. “버터톤 씨, 어떻게 무대에 선 당신 같은 배우들은 상상 속에 있는 것들을 말하면서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좀 말씀해 주십시오. 교회에서 우리 설교자들이 실재하는 것들을 전하는데도 회중은 그것이 상상 속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말입니다.” 버터톤 씨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주교님,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대에 선 우리 배우들은 상상 속에 있는 것들을 실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설교재단에 선 설교자들은 실재하는 것들을 상상 속에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지요.”[5]

 

그리고 이어서 윗필드가 말한다. “그러므로 저는 소리쳐 외칠 것입니다. 입만 번지르르한 설교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즉, 윗필드의 대답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배우들조차도 실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힘과 감정을 쏟아 붓는데, 실재하는 것을 말하는 설교자가 어떻게 가상에 있는 것을 말하듯 냉담하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이 말을 주의 깊게 숙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감정을 속이는 연기를 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진리를 다루고 있는지를 잊어서도 안 된다. 윗필드의 대답에 대해 존 파이퍼는 이렇게 언급한다.

 

이는 결국 윗필드의 "연기"가 결국 연극적인 의미에서의 연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 여성이 어느 영화에서 한 역할을 맡는다면, 카메라들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그녀가 소방관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2층 창문을 가리킬 떄 우리 모두는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일 당신의 이웃집에 불이 나고 어머니가 소방관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2층 창문을 가리키고 있다면, 아무도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들이 정확히 똑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거기에 아이가 불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 여성은 아이의 엄마다. 아이가 죽을 수 있는 위험이 정말로 존재한다. 모든 것이 정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윗필드에게 해당되는 방식이다. 거듭남은 그의 눈을 열어 실재하는 것과 그 실재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게 했다. 하나님, 창조, 인류, 죄, 사탄,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 천국, 지옥, 성육신, 그리스도의 온전함, 그분의 죽으심, 속죄, 구속, 화목, 부활, 성령, 구원하는 은혜, 죄 사함, 칭의, 하나님과의 화해, 평각, 성화, 사랑, 그리스도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즐거움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실재하는 것이었다. 윗필드에게는 그를 압도할 정도로 실재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무한히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는 거듭났고,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6]

 

설교자의 정서는 중요하다. 설교자가 설교 중 드러내는 정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훨씬 더 생생하고 마음에 와 닿는 방식으로 전하는 것을 도울 수도 있고, 반대로 설교의 몰입을 방해하거나, 불쾌감과 거부감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다. 설교자들은 사실상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오만하고 죄악된 정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내가 바르고 분명한 진리를 전달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내 설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구나.”하며 자위할 수도 있다. 이는 성도들과 설교자 모두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는가? (다음에서 계속)



1.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정성묵 옮김, (서울: 디모데, 2018), p. 94. 강조는 필자.

2. E.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2nd ed, Vol 2 (Grand Rapids: Baker, 1954), p. 307. 아놀드 델리모어, 『조지 윗필드: 18세기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오현미 옮김 (서울: 복 있는 사람, 2015), p. 23.에서 재인용.

3. 신광은, 『메가처치 논박』, (서울: 정연, 2009), p. 56. 다만 신광은 목사의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다.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어디로부터 밝히지 않는다.

4. 아놀드 델리모어, 『조지 윗필드』, pp. 64-65. 참조.

5. Stout, Divine Dramatist, pp. 239-240.

6. 언어의 영웅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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