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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광교회 성도들을 위한 목회서신입니다. 주로 이정규 목사가 글을 쓰지만, 교회의 다른 교역자들도 다양한 글감을 가지고 소통하는 이야기를 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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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광교회의 예배음악

이정규
2023-10-05
조회수 1221

시광교회의 예배음악

- 예배시의 음악사용과 문화에 대하여

 

이정규 (시광교회)

 

2023년 10월부터, 시광교회의 예배예전과 음악이 서서히 바뀔 겁니다. 일단 1부 예배에 콰이어가 도입됩니다. 그래서 4성부로 찬송가를 부르게 됩니다. 이 콰이어는 따로 합창을 하지는 않고, 회중 전체가 찬송을 부를 때 4성부로 함께 찬양함으로서 음악적으로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2부 예배와 신촌에서 하는 예배는 콰이어가 도입되는 대신, 예전 순서가 약간 바뀌고 곡이 바뀜으로 다양한 방식의 음악적 양식이 예배 때 시도될 것입니다.

 

그래서 연관해서 여러 글들을 좀 쓰려고 합니다. 많은 이야기들을 해야 하겠지만, 먼저 저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꽤나 복잡하고 건드리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꽤나 쉽게 감정적으로 분노하거나 낙심합니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십시오.

 

제임스 답슨(James Dobson)은 그의 “포커스 온 더 패밀리”(Focus on the Family)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유산에서부터 포르노를 포함하여 우리가 이 라디오 방송에서 다룬 모든 주제 중에서 가장 논쟁이 컸던 주제는 음악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람들을 더 빨리 화나게 만들 수 있는 주제가 바로 음악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음악 스타일에 대한 논쟁은 많은 교회 사이에 분쟁과 분열을 가져왔다. 아마 그래서 스펄전이 그의 음악 사역을 “전쟁 부서”라고 불렀을 것이다![1]

 

실제로 이건 제가 경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전에 예배 시의 EDM 음악이 적절지 않다는 글을 한 번 썼다가 거대한 분노를 마주한 적이 있었습니다(물로 그 이유는 단순히 음악 때문만은 아니었고, 저의 글쓰기의 미숙함 때문이었지만). 예배 시 악기중의 드럼 사용은 아직도 심심치 않게 SNS를 달구는 주제이고, 이 모든 대화 가운데는 논쟁의 상대편에 대한 격렬한 분노나 비아냥이 같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예배음악에 대한 두 거대한 입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현대적 예배’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고전적 찬송가와 시편찬송 등의 고루한 음률은 현대인들에게 결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는 역사적 예배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예배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소비적인 대중음악으로 인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현실 교회는 대체로 이 스펙트럼의 양쪽 끝 사이에서 다양한 입장들을 선택하고 있고, 그 입장들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배 음악을 사용하는 두 관점

 

저는 이 두 관점 모두가 어느 정도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입장도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합니다.

 

첫째, 현대적 관점

 

현대적 관점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문장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게 전도의 대상으로 정해 주신 종류의 사람들에게 맞는 음악을 선택해야 한다.”[2] 대체로 이러한 생각은 예배음악을 대중음악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꼭 나쁜 것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문제를 안게 됩니다.

 

a. 대체로 현대적 관점을 옹호하는 입장은, 찬송가와 같은 고대의 노래들을 피하는 경향을 띕니다. 이는 우리를 과거의 그리스도인들과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b. 찬송은 음악뿐만 아니라 가사로 이루어져 있고, 고대 찬송가의 가사들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깊이 있게 풀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사가 최소 3절에서 5절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현대성을 반영한 음악들은 대체로 가사가 빈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풍성하게 이해하여 노래로 고백하려는 신자들의 갈망을 막고, 새로운 신자들이 노래를 통해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체화할 기회를 앗아가 버립니다.

 

c. 무엇보다, 철저히 현대적인 예배 음악은 매우 빠른 속도로 시대에 뒤처지게 됩니다.[3] 풀밴드와 싱어들을 갖추어 놓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현대의 ccm들은 86세대와 X세대들에게는 ‘젊고 현대적’인 음악이지만, 90년대 후반의 Z세대들에게는 ‘오래된 부모님들의 음악’일 뿐입니다.

 

물론 대한민국처럼 문화의 스펙트럼이 적은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음악의 가짓수가 적기 때문에(미국 같은 경우에는 인종과 배경에 따라 그들을 움직이는 문화가 다르다) ‘공감하는 음악’을 찾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의 차이는 분명히 있고, 소위 ‘현대적 음악’이라는 말로 자신의 음악적 취향을 정당화 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둘째, 역사적 예배 관점

 

역사적 예배를 옹호하는 쪽은 현대의 대중음악이 고전적 예배의 음악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한국교회 전체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조차도 음악적으로 오염되었다고 여기고, 종교개혁 시기 제네바나 스코틀랜드에서 사용했던 시편찬송만이 기독교적으로 올바른 방식의 음악표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것만이 ‘역사적’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음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a. 이 ‘역사성’은 누구의 역사성입니까? 소위 ‘전통적’이라 부르는 음악은 대부분 매우 북유럽적이고 중산층적입니다. 팀 켈러의 표현에 따르자면, “엄격히 현대적 예배를 옹호하는 이들은 예배를 어느 한 현대 문화와 지나치게 결부시키는 반면, 엄격히 역사적 예배를 옹호하는 이들은 예배를 어느 한 과거 문화와 지나치게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4] 음악을 사용한 정서 표현이 16-17세기의 북유럽/클래식 접근 방식이기만 해야 한다는 믿음이 어떻게 성경적일 수 있습니까? 왜 국악은 고대의 것이라도 예배에 사용하면 안 됩니까?

 

b. 역사적 방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현대 음악은 대체로 사람들을 감정적으로만 고양시키고 하나님과 가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개인의 음악적 취향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음악적으로 고양시키지는 못하지만, 자신은 즐길 수 있는 음악 형태만을 절대시화하는 것이지요. 12년을 넘게 목회하면서 관찰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 찬송가 외의 여러 찬양팀이 쓰는 음악들은, 대체로 X세대와 86세대,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녀 세대들에게 와 닿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Z세대라 하더라도 모태신앙이다.

- MZ세대, 특히 Z세대인데 신앙을 처음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예술성이 상당히 높고 전위적인 음악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교회의 음악에 만족하지 못한다(그것이 무엇이든).

- 클래식 음악과 예전은 대체로 교육받은 중산층이거나 성가대/클래식음악 연주 및 청취를 훈련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끌린다. 이러한 비대중적 문화 형태를 누리려면 음악적 훈련이 많이 필요하다.

- 사실상 모두를 만족시키는 음악형태는 없다. 하지만 음악은 확실히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비신자들은 어떤 음악이든 간에 음악적 완성도가 낮은 음악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 음악 인도에 있어서의 ‘진정성’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음악적 감동은 자연스럽고 진정성 있는 호소로 이루어져야지, 사람들의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는 조작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훈련받은 신자들은 음악적 완성도가 ‘지나치게’(?) 높은 음악을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c. 현대적인 예배찬양의 가사 중에서도 수준 높은 노래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송영으로 쓰기 부족함이 없고, 『지극히 높으신 주』(이상 예수전도단)는 4절의 가사 가운데 구속사를 잘 요약하고 있지요. 『은혜 아래 있네』(아이자야 씩스티원)는 대속의 은혜를 잘 묘사하고 있고, 『온 땅의 주인』(어노인팅)이나 『거기 내 의가 있네』(김예찬)는 칭의와 이중전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균형 잡힌 관점?

 

그렇다면 양쪽 스펙트럼의 중간이 있을까요? 모두를 포괄하는 관점이 중요할까요?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결국 예배음악은 결정되어야 하고, 한 예배에 다양한 음악을 쓰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릭 워렌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새들백을 시작했을 때 나는 음악의 위력만 과소평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호에 다 맞추려고 노력하는 실수도 저질렀다. 우리는 ‘바하에서 록엔롤까지’ 모든 종류의 음악을 한 예배 시간에 다 포함시켰다. 우리는 전통적 찬송가와 성가 합창과 현대 기독교 음악을 함께 섞었다. 클래식과 컨트리 음악, 재즈, 록, 레게(서인도 제도 자마이카 기원의 록 뮤직), 경음악과 심지어 랩송도 사용했다. 사람들은 다음에는 어떤 음악이 나올지 전혀 예측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결과는? 우리는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고 반대로 모든 사람을 실망시켰던 것이다! 우리는 마치 모든 종류의 음악을 틀어서 모든 사람을 끌려고 했던, 내가 9장에서 언급한 그 라디오 방송과는 같았던 것이다.[5]

 

이 시점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어느 쪽 관점이든 항구적으로 성경적인 관점은 없다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창시자 존 녹스에 의해 제정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은 좋은 예배와 예식까지 제안하긴 하지만, 그것을 항구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정치와 의식도 그것이 모든 시대와 장소를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은 인간이 고안한 것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교회를 교화하기보다는 오히려 미신을 품게 하는 때는 그것을 변경해도 좋으며 또 변경시켜야 한다.[6]

 

많은 사람들은 칼뱅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는 4성부의 찬송이 예배에 부적합하다면서 단성음악만을 허용하였고, 성경 이외의 것을 예배 시간에 사용하는 것이 부적합하다면서 시편찬송만을 허용하였습니다.[7] 하지만 칼뱅이 한 다음의 말도 고려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적인 권징이나 의식들 가운데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을 상세하게 규정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것들에 대한 규율이 시대의 형편에 달려 있음을 미리 보셨으며 어느 한 가지 양식이 모든 시대에 획일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지켜야 할 일반적 규범으로서 부여하신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라는 명령을 도피처로 삼아서 이에 부응하는 것들로만 교회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것들은 주님이 분명한 가르침을 주신 적이 없고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각 민족과 세대의 관습들에 다양하게 맞추어야 한다. 교회의 복리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통상적인 관례를 변경하고 폐지해고 새로운 것들을 수립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는 갱신을 위하여 내달려야 하지만, 결코 무모하게 해서도, 내친김에 해서도, 경박한 이유를 앞세워 해서도 안 된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러나 무엇이 해치는 것이고 무엇이 세우는 것인지를 가장 잘 판단하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을 우리의 통치자로 받아들이자. 그리하면 모든 것이 안전할 것이다.[8]

 

즉, 우리는 공예배시에 쓰는 음악이 꼭 특정 형식일 필요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렇다고 특정 형식을 믹스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래의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음악에 대해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구원 관계를 설명하던 중, 33-36절에서는 즉흥적인 찬양을 갑자기 부릅니다! 이것은 거의 찬양이 ‘터져 나왔다’는 것에 가까울 것 같은데요. 이걸 통해 우리는 아래의 두 가지 진리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찬양이 빠진 채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성경의 진리를 단순히 배우고 가르치며 적용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 이상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노래할 대상으로 봅니다.

 

둘째, 성경이 빠진 채 찬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위의 말씀은 이사야 40장 13절을 34절에서 인용하고 있고, 35절에서는 욥기 41장 11절을 인용하고 있지요. 바울의 찬양은 성경의 진리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찬양은 공교해야합니다. 다음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시 33: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Skillful) 연주할지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찬양이 의인들(그리스도인들)의 마땅히 할 바라는 것입니다. 즉, 찬양을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주요 요소입니다. 구두수선공이 구두를 수선하는 것이 주된 업무이며,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이 주된 업무이듯,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찬양을 하는 것이 주 업무입니다.

 

또한 예배 시의 음악은 할 수 있는 한 아름답게, 잘 연주해야 합니다. ‘아름답게’ 연주하라고 말하는 히브리어 ‘야타브’는 정교한 연주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9] 물론 모든 예배 음악이 다 전문연주인의 연주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잘 부르고 연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팀 켈러는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예술의 힘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집중하게 한다. 상상력을 통하여 영혼에 들어가며 이성에 호소하기 시작한다. 음악의 수준, 당신의 설교, 그리고 예배의 시각적인 미적 요소들이, 특히 문화 중심지에서는, 전도적 역량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많은 교회에서 음악의 수준은 별 볼일 없거나 서투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신자들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비록 예술적 표현 수준이 떨어지더라도 신자들의 믿음이 찬송 가사나 노래에 의미를 갖게 한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음악 연주자와 개인적 친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 확신이 없고 연주자와 아무 개인적 친분도 없는 외부인이 들어온다면 음악에 대해 불편해지거나 신경이 거슬릴 것이다. 달리 말해서, 심미적으로 뛰어난 예술은 외부인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렇지만 그저 그런 수준 정도의 예술은 외부인을 밖에 나가게 한다. 많은 교회에서 낮은 수준의 예술이 보장하는 것은 오직 내부자들만 들어올 것이라는 점이다. 좋은 예술은 비신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10]

 

넷째, 찬양은 반드시 깊은 감정과 어우러져야 합니다. 찬양은 감정을 드러내고, 고양시켜야 합니다. 성경은 아주 많은 곳에서 눈물과 탄식, 기쁨과 만족,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즉, 찬양은 감정을 끌어올리고, 감정은 진리와 부합해야 합니다. 음악의 장르는 반드시 해당 가사가 요구하는 감정을 동시대인이 표현하기 좋은 방식이어야 합니다.

 

음악은 감정을 고양시키니 안 되고, 오직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감정을 절제하며 찬송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성을 최고의 신으로 삼는 계몽주의의 산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전인적 존재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방식은 꼭 이성적 방식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정과 몸의 섬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찬양에서 표현하는 문화는 모든 민족과 열방의 주재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예수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머리이며, 특정 민족과 문화에만 속한 부족신이 아니십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할 때, 특정 문화와 특정 장르의 음악만 다른 문화와 장르보다 더 옳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특정 문화의 부족신으로 만드는 셈입니다. 그분은 우리 전통적인 장로교회에 익숙한 사람들의 찬양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민족의 찬양과 영광을 받기 합당하시지요.[11]

 


음악에 관한 복음

 

다음의 두 구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 욥 38: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욥기에서, 성경은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 기쁨의 찬양 소리가 가득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8장은 타락 이후의 삶을 묘사하며 우리에게 기쁨이 사라졌고 탄식이 남았다고 말하지요. 성경은 세상이 만들어 졌을 때 모든 것이 완벽했고 죄와 악, 깨어짐과 병과 죽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 음악은 모든 곳에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자연이 탄식하고 우리도 탄식하지요. 우리 안에서 성령이 충만하면 우리는 노래하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인류는 탄식합니다. 우주는 음악과 함께 시작됐는데, 이제는 탄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더불어 노래하신다고 말합니다!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왜 탄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함께 찬양할 수 있었을까요? 본래 우리가 탄식하게 된 이유는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 탄식하셨습니다. 본래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성부로부터 사랑의 세레나데를 들으셨을 바로 그분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셨지요.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분이 탄식(신음)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가 덮여지고,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아버지 앞에 서서, 그분을 완벽하게 찬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 복음의 메시지가 시광 안에 차오르고 회중의 마음에 차오를 때, 우리는 탄식 대신 찬양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공예배에서 부르는 찬양은, 음악이 주는 깊은 감동을 포괄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시광에서 그러한 노래가 늘 터져나오기를 기도합니다.



1.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교회』, 김현회 옮김 (서울: 디모데, 2008), p. 317.

2. 위의 책, p. 313.

3. 팀 켈러, 『말씀 아래서 드리는 예배』, pp. 272-273.

4. 위의 책, p 274.

5. 위의 책, p 312.

6. James T. Dennison Jr., Reformed Confessions of the 16th and 17th Centuries in English Translation: 1523–1693, vol. 2 (Grand Rapids, MI: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08–2014), pp. 200–201.

7.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칼뱅이 가장 엄격한 수준의 입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이견이 있다.

8.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 2,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vol. 1,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1), p. 1208. IV, 10, 30.

9. Francis Brown, Samuel Rolles Driver, and Charles Augustus Briggs, “יטב” Enhanced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xford: Clarendon Press, 1977), pp. 405-406.

10. 팀 켈러, 『센터처치』, pp. 639-640.

11. John Piper, Let the Nations Be Glad! The Supremacy of God in Missions, 30th Anniversary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A Division of Baker Publishing Group, 2022), 7챕터를 보라. 이 문단의 내용은 7챕터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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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1122 신대림자이 202동 상가 3층 3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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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6925-2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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